한국역사

옥저와 동예 그리고 삼한

블랙다니 2023. 5. 23.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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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예 군장의 도장
동예 군장의 도장 : 중국의 동진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보인다.

소금을 만든 옥저

옥저는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하여 함경도 해안 지방에 있었던 나라입니다. 왕은 없고 읍군이나 삼로라는 부족의 대표자가 자기 부족을 다스렸습니다. 옥저는 바다 가까이 있어서 해산물이 많이 생산되었으며 소금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습니다. 옥저에서는 여자가 10세가 되면 약혼을 하고 신랑이 될 사람의 집으로 가서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리고 결혼할 때가 되면 신부는 집으로 돌아와 신랑 집으로 가게 됩니다. 이런 풍습을 '민며느리제'라고 합니다. 

옥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땅을 얕게 파고 시체를 임시로 묻어 두었다가 살이 썩어 없어지면 뼈만 추려 커다란 나무 상자에 넣었습니다. 이런 풍습을 '세골장'이라고 합니다. 한 가족의 뼈는 모두 같은 나무 상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무토막에 죽은 사람의 모습을 숫자대로 새겨 넣고 항아리에 쌀을 담아 매달아 놓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먹을 수 있게 쌀을 준비해 두는 것입니다. 

점뼈
점뼈 : 사슴이나 멧돼지의 견갑골을 다듬어 사용했다. 견갑골에 구멍을  내고 불을 붙여 뼈가 가라지는 모양을 보고 점을 친다.

활, 과하마로 유명한 동예

동예는 강원도 북부 지방과 한반도 북부의 중앙 고원 지대에 자리 잡았습니다. 동예는 당이 기름져 농사가 잘되고 해산물이 많이 생산되었습니다. 또한 별자리를 관찰해서 농사에 필요한 절기와 기후를 알아냈습니다. 누에를 쳐서 실을 뽑아 명주를 짜고 삼을 길러 삼베를 짜는 등 방직 기술도 발달했습니다. 동예는 단궁이라는 활과 과하마로 특히 유명했습니다. 

과하마는 과수나무 밑으로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작은 말이란 뜻입니다. 

동예는 왕이 없고 후, 읍군, 삼로가 각각 자기 영역을 다스렸습니다. 각 읍락들은 산천으로 자기 영역의 경계를 삼았습니다. 만약 다른 읍락의 사람이 경계를 침범하면 노비와 소, 말로 물어내도록 했습니다. 

이런 풍습을 '책화'라고 합니다.

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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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 여러 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나라

기원전 194년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고조선의 준왕이 남쪽 진국으로 갔습니다. 이때 준왕이 도착한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금마 일대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익산 지방에서는 준왕의 후손들이 익산에 있는 쌍릉을 준왕의 무덤으로 여기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준왕과 관련된 지명과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고조선 또는 중국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새로운 문화와 본래의 토착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한반도 남부에는 수십 개의 소국들이 세워졌습니다. 이들의 마한, 변한, 진한으로 연맹을 이루였으며, 이들을 '삼한'이라고 합니다. 

마한은 지금의 대전과 익산 지방을 중심으로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진한은 지금의 대구, 경주 지방에 있는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변한은 지금의 김해, 마산 지방에 있는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삼한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큰 곳은 마한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한의 강국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삼한 전체를 이끌었습니다. 

각 소국을 이끄는 지배자들 가운데 세력이 큰 것은 '신지', '견지'라고 불렀고, 작은 것은 '부례', '읍차'라고 불렀습니다. 정치를 주관하는 지배자 외에 제사만을 주관하는 천군이 따로 있었는데 천군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삼한에서는 고조선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처럼 정치 지배자가 제사장을 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제사가 일찍부터 분리되었던 것입니다. 

삼한에는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이 따로 있었는데 이 지역을 '소도'라고 합니다. 소도는 신성한 지역이어서 죄인이 도망쳐 들어가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도는 삼한 사람들의 정신적인 중심지이자 종교였습니다. 

씨를 뿌리고 난 후인 5월과 추수가 끝난 후인 10월에는 제천행사를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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