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 대왕의 정복 전쟁
소수림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고국양왕에게는 담덕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담덕이 바로 동북아시아를 주름잡은 광개토 대왕입니다.
광개토 대왕은 18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중극은 5호 16국 시대의 혼란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광개토 대왕은 중국이 혼란을 겪고 있는 틈을 타서 대대적인 정복 전쟁을 계획했습니다.
광개토 대왕은 중국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남쪽에서 세력을 뻗치고 있는 백제를 누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392년 직접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백제의 아신왕은 고구려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표시로 남녀 1,000명과 고운 베 1,000필을 바치고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인질로 보냈습니다.
고구려의 서쪽 요동 지방에는 후연이 있었습니다. 후연은 5호 16국 중의 하나로 모용씨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후연은 고구려의 세력이 날로 커가는 것을 두려워해서 이를 막기 위해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광개토 대왕은 후연으로 쳐들어가서 요동 지방을 차지했습니다. 광개토 대왕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거란과 말갈을 정벌하고 동부여를 굴복시켰습니다.
이러한 정복 전쟁으로 고구려의 영토는 매우 넓어졌습니다. 북쪽으로는 헤이롱강, 남쪽으로는 임진강,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내몽고와 중국 동북 지방에 걸친 대제국을 이루어 동북아시아 최강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진대법 : 2세기 말, 고국천왕 때 재상 을파소의 건의에 따라 실시된 진대법은 곡식이 모자라는 봄에 나라에서 농민들에게 싼 이자로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추수가 끝난 가을에 돌려받는 제도였다. 진대법의 목적은 농민들이 귀족들에게 곡식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고 귀족의 노비가 되는 것을 막는 데 있었다. 노비는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노비의 숫자가 늘고 농민의 숫자가 줄어들면 그만큼 거두어들일 세금이 적어져서 나라 살림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장수왕
광개토 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아버지인 광개토 대왕의 뜻을 받들어 중국의 진, 송, 위 등과 사신을 교환하며 국교를 맺고 427년 수도를 압록강가의 국내성에서 대동강가의 평양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남쪽으로 눈을 돌려 백제와 신라를 공격해 적극적으로 한반도 남부를 평정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먼저 장수왕은 백제를 쳐서 한강 유역을 차지했습니다.
한강 이남으로 밀려난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이 동맹을 '나제 동맹'이라고 합니다.
장수왕은 남으로는 아산만에서 동쪽의 죽령, 북서쪽으로는 만주 지방 대부분을 차지해서 고구려의 영토는 장수왕 때 가장 넓었습니다.
414년 장수왕은 아버지인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 대왕릉비를 만들었습니다. 이 비의 본래 이름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입니다. 현재 고구려의 옛수도였던 국내성이 있었던 곳에 있습니다.
광개토 대왕릉비는 높이 6.4m의 거대한 천연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4면 가득히 고구려의 건국부터 광개토 대왕 때가지의 주요 사건을 1,800여 자의 한자로 새겨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비는 고구려 역사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입니다.
한편, 일본은 광개토 대왕릉비에 새겨진 내용 중 한 구절을 '임나일본부'의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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