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백제 도읍의 천도

블랙다니 2023. 11. 12. 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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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일대를 잃고 웅진성으로 천도

백제는 도읍을 여러 번 옮겼습니다. 도읍을 옮기는 것을 '천도'라고 하는데 한강 근처의 위례성에서 웅진성으로, 웅진성에서 다시 사비성으로 천도했습니다. 

한강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중부와 남부를 손에 넣고 위력을 떨치던 백제는 427년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남진 정책을 펴면서 백제를 위협해 오자 그에 대비하기 위해 433년 비유왕 때 신라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를 '나제 동맹'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475년 개로왕 때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도읍이 함락되면서 500년 가까이 지켜 온 한강 일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개로왕을 비롯하여 태후, 왕자들은 모두 죽었으며 8,000여 명이 포로로 고구려 잡혀갔습니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은 서둘러 도읍을 더 남쪽에 있는 웅진성으로 옮겼습니다. 웅진성은 직금의 충청남도 공주 지역입니다. 

<삼국사기>에는 개로왕에 대한 이야기가 2편 실려 있습니다. 첫 번째는 승려 도림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개로왕은 바둑을 몹시 좋아했습니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첩자로 보내 개로왕에게 접근하게 했습니다. 뛰어난 바둑 실력을 지닌 도림은 개로왕과 금방 친해졌습니다. 도림은 왕실이 위엄을 갖추려면 궁전을 크게 지어야 한다고 부추겼습니다. 그 말에 솔깃해진 개로왕은 무리한 공사를 벌였으며 그 때문에 국력이 약해지고 백성의 원망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공격 앞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도미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백제 사람인 도미에게는 아주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습니다. 

개로왕은 도미 부인이 탐이 나서 도미의 두 눈을 멀게 하여 멀리 쫓아 버렸습니다. 

생김새뿐 아니라 마음씨도 바르고 고왔던 도미 부인은 개로왕의 유혹을 뿌리치고 달아나 남편과 함께 고구려로 갔다고 합니다. 

두 이야기에 따르면 개로왕은 포악하고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개로왕은 이 이야기와는 달리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키우는 데 힘을 쓴 왕이었습니다.

아마 이 이야기는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자 그가 형편없는 왕이었다고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추측됩니다.

 

익산미륵사지석탑
익산 미륵사지 석탑 : 백제 최대의 절이었던 미륵사 터에 있는 탑이다.벼락을 맞아 무너진 것을 시멘트로 덧발라 놓았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최초의 석탑으로 그 전까지는 모두 나무로 지은 목탑이었다. 이 탑은 목탑을 짓는 방식 그대로 돌을 사용하여 지었다.

 

백제를 다시 일으킨 성왕

웅진성으로 도웁을 옮긴 백제가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회복하게 된 것은 6세기 전반 무령왕과 성왕 때였습니다. 

무령왕은 22개의 담로를 두고 왕족을 파견해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또한 수리 시설을 정비해 금강 일대와 호남 평양의 농업을 일으키고 전쟁과 굶주림을 피해 도망친 농민들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한강 일대를 되찾기 위해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무령왕 때의 안정된 정치를 바탕으로 국력을 키운 백제는 538년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 때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성왕은 백제를 부흥시킨 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성왕은 도읍을 사비성으로 옮긴 다음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고 바꾸었습니다. 

그 무렵 만주 일대에 있던 부여가 고구려에게 항복하자 부여의 전통을 잇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붙인 이름입니다. 

남부여라는 이름은 성왕의 죽은 뒤 다시 백제로 바뀌었습니다. 

성왕은 수도와 지방의 체제를 새롭게 정비하고 불교를 장려했으며 중국의 남조와 교류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신라의 진흥왕과 손잡고 고구려를 공격해 마침내 한강 일대를 되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개로왕 때 빼앗긴 한강 일대를 약 80년 만에 다시 찾은 것입니다.

한강 상류를 신라가 하류는 백제가 각각 나누어 가지기로 약속을 했지만 신라의 진흥왕은 약속을 어기고 백제를 공격해 한강 일대를 모두 차지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성왕은 군사를 이끌고 신라와 싸웠으나 관산성,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553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로써 120년 동안 계속되어 온 나제 동맹은 깨지고 한강 일대는 신라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성왕이 죽은 뒤 한동안 약해졌던 백제는 무왕 때 왕권을 강화하고 다시 국력을 키웠습니다. 무왕은 익산에 거대한 미륵사를 세우고 스스로를 불교를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이라고 칭하면서 익산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했지만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무왕의 아들 의자왕은 귀족들을 추방하고 강력한 왕권을 세웠으며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 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당나라와 손잡은 신라의 공격을 받고 사비성이 함락되었고 결국 백제는 670여 년만에 멸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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