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역사

그리스 사람들

블랙다니 2023. 10. 22. 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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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 극장
디오니소스 극장 :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야외 극장으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남동쪽에 있다. 그리스 3대 비극 시인으로 불리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연극 공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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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인의 생활

그리스 도시 국가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아테네와 스파르타입니다. 그중에서 도시의 분위기가 개방적이었던 아테네는 민주 정치를 발전시켰습니다. 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 사람들은 시민, 아테네에 사는 외국인, 노예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인구가 가장 많았을 때에는 시민의 수가 약 16만 명 정도로, 시민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남자만이 시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집회, 법정, 군대, 운동 경기장, 시장 등지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테네에 사는 외국인은 모두 합쳐서 3만 5000명 정도였고 이들도 모두 그리스 인이었습니다. 

정치적 권리가 없고 토지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을 빼면 아테네 남자 심니과 똑같이 대접받았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었고 다양한 사회 활동에 참여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대부분 평등한 생활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큰 부자도 없었고 시민과 외국인, 노예 모두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귀족의 생활이나 빈부의 차이가 같은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좋은 옷과 좋은 음식, 사치스러운 생활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가 시간에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아테네 여자들의 생활은 매우 단조로웠습니다. 여자 아이들은 어머니가 홀로 돌보았으며 바느질, 요리, 남성에 대한 복종 같은 것을 배운 뿐이었습니다. 때로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지기도 했습니다. 

여자는 결혼 상대자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고, 부모가 정해 주는 사람과 결혼해야 했습니다. 결혼 후에는 바깥에 나갈 수 없었고 하루 종일 주방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고 정치적 권리도 당연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의 민주 정치가 가장 발달한 시기에도 여성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스파르타 인의 생활

스파르타 인은 아테네 인과 다르게 살았습니다. 스파르타는 사회 분위기가 폐쇄적이었고 소수의 도리아 인이 다수의 노예를 다스렸습니다. 

스파르타 인은 훌륭한 군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스파르타에 사는 사람들도 시민, 스파르타에 사는 외국인, 노예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스파르타 시민의 수는 전체 인구의 5%에 불과했고 스파르타 시민은 모두 군인이었습니다. 

외국인들은 페리오이코이라고 불렸는데 주로 상공업에 종사했습니다. 세금을 내고 군인으로 복무해야 했으니 정치에 참여할 수는 없었습니다. 노예들은 헤일로타이라고 불렸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노예들은 틈만 나면 반란을 일으키려 했기 때문에 스파르타 시민들은 늘 노예들을 경계했습니다. 

스파르타 시민의 생활은 별로 행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일생의 대부분을 군대에서 생활했으며 개인적인 취미 생활은 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건강한지를 검사했고 허약한 아이들은 버려졌습니다. 

교육도 모두 군사 훈련이었습니다. 결혼 역시 나라에서 정해진 사람과 해야 했고 가정생활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자들이 모두 군대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가정에서 여성의 위치는 아테네보다 상대적으로 높았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철학을 중시한 그리스 인

그리스 철학은 자연 탐구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가 되면서 탐구의 대상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리스 철학은 커다란 변화를 겪기 시작했습니다. 

이 당시 아테네는 민주 정치가 최고로 발달한 시기였습니다. 뛰어난 정치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은 소피스트라 불리는 지식인들에게 웅변과 정치에 필요한 지식들을 배웠습니다. 

궤변학파라고도 불리는 소피스트는 철학자로도 활동하면서 철학의 관심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돌려놓는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했던 까닭에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을 남긴 프로타고라스도 소피스트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등장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입니다. 그리스 철학의 전성기를 열었던 소크라테스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했습니다.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나자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신들을 무시한다는 죄명으로 아테네 권력자들에 의해 고발을 당했고 결국 사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제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전해져 훗날 서양 철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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