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앞선 고대 문명의 근원지 오리엔트
오리엔트는 동쪽이라는 뜻입니다. 오리엔트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들은 로마 인으로 지중해의 동쪽 지방을 뜻했습니다. 오리엔트는 문명이 가장 먼저 나타났고 그것을 바탕으로 앞선 문화를 꽃피운 지역입니다. 세계 최초로 문명을 일으킨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도 이곳에 있습니다.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자동차와 배, 건물을 만들때 필요한 철을 잘 다루었던 히타이트 인들도 오리엔트에 살았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민족들이 지중해 근처의 오리엔트에 살았습니다. 알파벳의 기원이 되는 문자를 발명한 페니키아 인 그리고 크리스트교의 기원이 되는 유대교를 믿었던 유대 인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오늘날 그 수가 아주 적어졌거나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진 민족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없었다면 인류 역사는 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2. 히타이트 민족
인류는 처음에 나무와 돌을 재료로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차츰 구리와 주석 등을 녹여서 만든 청동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동의 뒤를 이어 사용된것은 철입니다. 청동에 비해 철은 자연 상태 그대로 얻을 수 있고 양도 풍부했습니다. 하지만 철을 다루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철은 청동보다 아주 높은 온도에서 녹고 불에 녹여 원하는 형태로 만들었다 해도 금방 녹이 슬어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철을 잘 다루는 민족이 있었습니다. 바로 히타이트 인입니다.
히타이트 사람들은 숯으로 불을 피워 철에 열을 가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숯에 포함된 탄소가 철 속으로 스며드는데 탄소가 스며든 철은 매우 단단하고 잘 녹슬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좋은 철은 금보다 몇십 배나 비쌌다고 합니다. 그래서 히타이트 사람들은 철 만드는 법을 비밀로 했을 뿐만 아니라 철로 만든 도구를 사고파는 일조차 금지했다고 합니다.
3. 히타이트의 번영
히타이트는 고대 오리엔트에서 강력한 국가를 이루었지만 그들에 관해서는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들은 기원전 1650년경에 터키 하투스(오늘날 보가즈쾨이)를 수도로 정하고 넓은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기원전 16세기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최초로 통일한 바빌로니아 왕국을 멸망시킬 정도로 강해졌습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쇠퇴했으나 다시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기원전 14세기 후반에 재위한 수필룰리우마스 1세는 미탄니, 시리아 등 주변 지역으로 영토를 넓히고 수도에 견고한 성벽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12세기 후반에는 이집트와 충돌했습니다. 당시 이집트의 왕은 가장 위대한 파라오로 꼽히는 람세스 2세였습니다.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스는 시리아의 지배권을 놓고 오론테스 강 유역에 위치한 카데시에서 라세스 2세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싸움은 두 문명의 충돌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히타이트는 가벼운 전차와 단단한 철제 무기로 무장된 군대를 동원해 람세스 2세를 포위하는 등 이집트와 대등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수십 년 동안의 전투 끝에 하투실리 3세와 람세스 2세는 결국 카데시에서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것이 세계 최초의 국제 조약입니다.
히타이트 사람들은 건축술이 뛰어나 거대한 성과 신전, 도시들을 만들었지만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스였던 보가즈쾨이에 히타이트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보가즈쾨이에서 발견된 궁전터와 도서관터, 주거지 등을 통해 히타이트의 찬란했던 문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4. 히타이트 멸망의 수수께끼
히타이트의 마지막 왕은 수필룰리우마스 2세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200년경 수필룰리우마스 2세 때 히타이트가 바다 민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일부 사람들이 시리아로 이주하여 신히타이트 왕국을 세웠다고 합니다. 히타이트가 멸망한 후 그 중시지였던 아나톨리아 고원은 수백 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채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히타이트를 멸망시킨 민족이 어떤 민족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그 민족이 왜 히타이트에서 살지 않았는지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사자의 문은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스가 있었던 터키의 보가즈쾨이에 있습니다. 하투스에는 약 7000명 정도가 살았으며 왕의문, 사자의 문, 지하의 문이라는 3개의 문을 통해 출입이 통제되었습니다. 사자의 문을 통해 히타이트 인의 남성적이고 뛰어난 예술 감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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